
[노징(Nosing)]
잔에 코를 대면 설탕에 절인 물복숭아의 향미가 뛰어난 해상도로 다가온다. 이는 복합적인 천연 복숭아라기보다는 향수에 쓰이는 락톤만을 따로 추출해 낸 듯 선명하고 직관적인 뉘앙스다. 과일 구미나 젤리에 들어가는 가향 시럽의 달큰함에 약간의 매캐함이 더해져, 전반적으로 향수처럼 퍼퓨미한 인상을 준다. 향이 어느 정도 안정된 후 다시 시향하면 코리앤더 시드를 시작으로 백년초 열매에 칠성사이다를 탄 듯한 달큰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상큼 시원한 뉘앙스가 곁들여진다. 시간이 흐를수록 화이트 발사믹을 연상시키는 시큰함이 올라오지만, 다른 향을 덮을 정도는 아니며 기분 좋은 산미로 곁들여지는 선에서 훌륭하게 마무리된다. 이러한 주된 향미들 뒤로는 적후추나 넛맥같은 유러피안 오크 특유의 스파이스가 은근한 꼬릿함과 어우러져 향의 복합성을 끌어올린다. 향이 서서히 풀리면서 초반에 잠깐 스쳐 지나갔던 짚단과 허브의 뉘앙스는 배경으로 물러나고, 대신 네롤리, 프랜지패니, 오렌지 블라썸 같은 화사한 플로럴 노트가 바닐라와 섞여 만개한다.
[팔렛(Palate)]
입안에 닿는 첫인상은 마냥 달기만 한 것이 아니라 흑당처럼 진하고 무겁게 혀를 절이는 듯하다. 오랫동안 점착되는 이 당분감 위로 노징에서 느꼈던 복숭아와 백년초의 뉘앙스가 선명하게 얹힌다. 입안에서 술을 굴릴수록 혀 전반에 꺼끌꺼끌한 질감이 코팅되듯 남으며, 동시에 시큰한 레몬의 산미가 한 번 크게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역동적인 변화를 보여준다. 비강으로 뿜어내는 향은 매우 퍼퓨미하다. 강한 감칠맛을 바탕으로 앞서 감지했던 가향된 과실의 풍미와 청량한 시트러스가 화려하게 섞여 든다. 계속해서 굴리다 보면 약간의 짚단 뉘앙스와 함께 유러피안 오크 특유의 묵직한 나무 향이 입안을 채운다. 이 당분감 사이사이를 누비듯, 마치 시럽에 물을 약간 탄 것처럼 묽은 블랙베리의 뉘앙스도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초반에는 스파이시한 자극이 꽤 명확하게 다가오지만, 그에 반해 액체 자체가 가진 바디감은 61.7%라는 고도수가 무색할 만큼 상당히 가볍고 경쾌한 편이다.
[피니쉬(Finish)]
목 넘김 후 피어오르는 브래스에서는 복숭아, 오렌지, 레몬, 그리고 정향의 복합적인 향미가 은근하게 퍼져나간다. 피니시의 폭발력 자체는 차분한 편이지만, 그 지속력만큼은 상당히 강하다. 간간하고 은은하게 맴돌던 유러피안 오크의 스파이스가 서서히 빠져나갈 즈음, 비강과 호흡을 타고 부드럽고 퍼퓨미한 향미가 다시금 피어오른다. 이 향미는 프랜지패니, 재스민, 바닐라가 어우러진 향수의 어코드처럼 탄탄한 구조감을 뽐내며 꽤 오랫동안 머문다. 입맛을 계속 다시다 보면 밀랍을 코팅한 듯한 질감과 향미가 어느 순간 미끈거리는 감촉과 함께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모든 여운이 가시고 최종적으로 입안에 남는 것은 기분 좋은 미끈거리는 오일리함과, 첫 노징에서 느꼈던 화이트 발사믹, 오랜지 필 오일의 풍부한 향미다.
[총평]
진득한 베리뉘앙스의 탐듀에 숨겨진 우아함이 뭔지 좀 더 깊게 파보고 싶을 때 그 단편을 보여 줄 수 있는 한 잔.